세상이 없는 거룩함 vs 세상안에서의 거룩함
90년대 초반, 저의 20대 초반에 한 목사님과 함께 몇 명의 대학생들 위주의 작은 개척교회에서
여러 권의 경건서적을 함께 읽으며 토론하는 모임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적들을 읽고 적용점들을 나누며,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했던 모임이었습니다.
한번은 그때 당시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미국의 Willow Creek Church의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에 대한
글들을 읽고, 교회에서도 그런 모임을 하자고 적용하게 되었고, 그리고 드디어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시내 중심가의 커피샵을 빌려 교회 청년들의
재능기부의 형태로 행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학교후 시내를 배회하고 다니던 여중생 서 너 명이 연결되었고
드디어 그 아이들이 저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온 아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가졌습니다.
늘 애정과 관심이 고팠던 그 친구들은 교회의 형들이나 누나들에게 다가와
먹을것을 사달라고 하기도 하였고, 점차 그 교회의 목사님은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 지쳐가는 듯 하시더니 어느날은 교회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이들에게 말을 하셨던것 같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을 떠나 보내면서 그 아이들이 걸어갔던 도로를 바라보며,
뭐라고 정의할수 없는 상실감과 아픔에 젖어들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그 후로는 그런 류의 행사는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남아공 우스터에서 DTS 스탭으로 첫번째 섬기게 되었던 때,
영어도 부족한데, 참석한 아이들은 대부분 십대 아이들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문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입술과 혀, 몸의 곳곳에 피어싱을 한 채로 DTS에 참여했습니다.
그 무리 중에 한 여자친구는
나중에 들어보니 베이스 이곳 저곳에서 흡연을 하다가 발각되기도 하고, 드디어 소지품중에 마약이 들어있어서 DTS Director와 면담 후 학교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벌어지기 며칠전, 베이스에서 우연히 그 친구와 마주친 저는 잠깐 이야기 해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고 잔듸 밭에 앉았는데, 그 친구는 또 스탭이 뭐라고 하나 보다라고 잔뜩 긴장한 채로 제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 너 안에 진짜 엄청난 잠재력이 있는게 느껴져. 나는 너의 잠재력이 꽃 피웠으면 좋겠어." 딱 겨우 몇마디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밝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더 무언가 말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접근하고 사역해야 하는지모르는데다 영어의 부족으로 더욱 한계에 직면했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가 떠난 직후 충격에 사로잡힌 스탭과 학생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여러 명의 학생들 사이에서 스탭들에게 그 친구가 그런 문제를 가지고 왔는데, 그럼 당신들은 그 학생을 돕기 위해서 무엇을 했냐고물어보았습니다.
실은 그 학생에 대해 스탭회의때 나누고 기도했지만, 그 DTS Director는 자신이 운영하게된 그 school에 그런(?) 학생이 있는 것을 매우 힘들어하고 인내심이 바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할말이 없었습니다. 고개를 파묻고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친구가 짐을 싸고 나가면서 스탭중에 제가 먼저 다가와서 자신에게 잠재력이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고마웠는지 인상이 깊었는지 그것 외에는 스탭들이 해준게 뭐냐고, 정죄하고 비난한것 외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자훈련학교(DTS)를 하겠다고 전 세계적으로 학생들을 모집하고서문신과 피어싱, 담배와 마약을 들고온 친구를 보내야 했습니다.
다시 똑 같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20대 청년의 때에 경험한 그 말로 형언하기 힘들었던 무기력함을, 길거리에서 대부분을 보냈던 그 여중생들을 교회에서 보냈던 경험을 다시 30대에 선교단체에서 경험한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계속 찾았습니다.
그런 무기력함과 패배감이 드는 상황가운데 해결책을 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미국의 캘리포니아 Mendocino SSM(Supernatural School of Mission)
거기서 경험한 강의들과 사역 경험, 그리고 거기서 만난 30대 초반의 한 미국자매,
30대 초반까지 자신이 태어난 한 블락안에서 살았다는 그 자매의 간증, 그때까지
운전면허증도 없이 자신이 사는 그 집 주변에서 30대 초반까지 마약에 쩔어 지냈던
그 자매가 SSM을 운영하던 그 베이스의 DTS를 통해 예수님을 경험하고, 마약중독에서
벗어나고, 얼마나 기도와 예배에 전념하던지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이 한 줄기 빛으로 내 삶에 다가왔습니다.
누군가 찾아와서 나의 약점을 새롭게 발견해서 말해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정말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말해주는,
우리가 왜 이 땅에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선포해줄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남의 연약함을 분별하는 것은 그다지 은사와 믿음이 필요해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상은 그렇지 않을때에도 여전히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할때 믿음과 은사가 필요하다.
여전히 죄가운데 소외되어 있는 한 사람이 혹시 예수님을 볼수 있을까 하고
나무에 올라갔을때 그 사람의 소외와 죄의식은 뒤로 한채
"삭개오야, 너희집 가서 밥먹자" 고 말씀하신 그 한 마디에
삭개오는 완전히 변해버린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말한마디가
영혼을 바꾼다.
예수님의 주변은 항상 당시의 종교인들이 너무나 멸시하는 죄인들로 가득했습니다.
거룩함 자체이신 예수님의 식사친구들은 세리와 창녀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 만으로 당시의 종교인들은 불편해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의 " 물" 에 대한 대화에서 시작해서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사용하여
여인의 현재의 상황을 말함으로써 이 여인에게 있는 예배에 대한 갈증을 끌어내십니다.
19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누구도 듣지 못한 예배의 정의를 이 물길으러
온 여인에게 말해주십니다.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너가 있는 곳은 사마리아지.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린 예배가 진짜라고 말하지..
그래서 때때로 너의 마음가운데 '나도 예배하고 싶은데.. 이곳 사마리아가 아니라
왜 예루살렘에서만 드리는 예배가 합당할까? 그럼 나는 하나님께 가는 방법이 없을까?
라는 질문을 했지?
그런데 있잖아.
하나님은 영이셔. 그러니 너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하나님이 받으신단다.
예배의 갈증이 해결된 남편 다섯이 있었고, 다른 한 남자와 동거하던 이 여인은
한 마을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39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세상을 떠난 종교는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참된 거룩함은 세상으로 다가옵니다.
마태복음 17장 그 밖에 다른 복음서들에서도 이 땅에서
놀라운 체험을 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절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이 얼마나 놀라운 체험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태양과 같이 강렬하게 빛을 발산하고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형상을 이땅에서 본것입니다. 게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4절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성경에 이런 베드로의 제안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반응하는게 나옵니까?
그냥 산에서 내려오시고, 귀신에 시달리는 한 아이를 고쳐주십니다.
지극한 영적인 체험은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에서 능력있게 살도록 주어진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고 그 정도가 종말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가, 크리스챤이 어떤 빛으로 살아가는지
얼마나 영향력있는 소금으로써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구별됨은 세상안에서의 구별됨이지 세상밖으로의 구별됨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경건의 모양과 동시에 경건의 능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마치 소량의 누룩만 있어도 그곳에 누룩이 전부 퍼지는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