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ing ground(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되는 여정)

성령님의 은사들을 건강하게 드러내는 사역

Going to Nations 2021. 3. 19.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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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 저희 어머니는 소위 신내림체험을 하고, 그 이후 우리 가족의 삶이 엄청난 위기에 직면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끊임없이 귀신의 소리를 들으시면서, 그 목소리와 싸우셨고, 교회 새벽기도를 가지 말라고 방해하는 것을 거부 하신채 교회 새벽기도로 향하신 이후 부터는 귀신이 떠나갔다는 간증을 나중에서야 어머니로 부터 듣게 되었는데, 아무튼 그 사건이후로 깊게 상처를 받으신 어머니는 아직도 기도하실 때면 늘 죄를 고백하고 기도할수도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신후 기도를 하시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늘 어떤 압박감에 시달리신 어머니는 자주 기도원 등을 가고 하셨는데, 한번은 학교가 끝난후 집에 돌아와보니 기도원에 다녀오셨다는 어머니가 무슨 중병에 걸린 사람 마냥 앓는 소리를 하며 누워 계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여쭤보았는데,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원 원장이" 안찰"이라면서 

 

온몸을 구타해서 여기저기 검 붉게 멍이 올라오니 그게 다 " 죄"라며 옆에 있는 사람들과 더 합세해서 얼마나 구타했는지,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본 사춘기때의 저는 거의 눈이 뒤집혀졌고- 그때 당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도 못했고, 그냥 어머님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장 그 기도원으로 쫒아가서 그 기도원 원장을 가만 안두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어머님이 우시면서 당신은 그럼 못 사신다고, 다신 그 기도원에 안갈테니 그냥 못본체 하라고 하셔서 주저 앉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배에 얼마나 많이 때렸는지 시퍼렇다 못해 검붉은 그 멍들은 지금도 보이는 듯 합니다.

 

 

 

그 이후 성경에서 안찰을 찾아보자 당시 나온 한 구절 

 

구약성경(개역성경) 열왕기하 13장 16절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에 '안찰'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 나왔습니다. 그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찾아보고, - 그 후에 개역개정에서 이 부분이 "손 위에 얹고" 로 바뀌어있습니다.-

그냥 손을 얹다라고 나와있는 부분을 보고, 그 부분을 어머니에게 설명해드리게 되었고, 어머니의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체험들속에서 옆에서 사랑하는 어머니를 지키고 함께 기도하기 위해 여러 서적들을 구입하게 되었고, 한때는 기독교 서점에서 무조건 은사나 치유사역에 대한 책은 전부 구입하여 보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 은사사역을 한다는 다양한 집회가 있으면 여기저기 찾아가 보며, 사역을 살펴보고, 성경이나 각종 자료들을 찾아 가며 공부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능력이 있다거나 은사가 있는 분들의 사역에서 여러번 다양한 종류의 비성경적인 모습들을 접하였지만, 늘 제 마음 한켠에는 그래도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긍휼에서 나오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사역,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사역들을 저의 눈으로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1992년도쯤, 한참 다미 선교회의 영향으로 인해 여기저기 수많은 교회들에서 집에 가지 않고 밤새도록 철야기도를 하고있는 그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심각한 질병에 걸려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아빠와 엄마가 또는 자녀들이 밤마다 휴거를 놓칠수 있다는 걱정에 교회에 가 있었으니-

 

한 시골에서 올라온 대학 후배가 자신이 어느 교회에 갔는데, 그 전도사님이 투시의 은사가 있어서 자신을 꿰뚫어 보는데, 자신은 무언가 성경적으로 반박할수 없다며, 그 교회를 함께 가줄수 없냐고 제안해서 흔쾌히 그 후배랑 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오후인데도 철야로 인해 여기저기 누워 계신 분들이 계셨고, 한쪽 방 으로 우리를 안내하신 그 교회 전도사님은 아니나 다를까 앉으시자 마자 저를 바라보시며" 내가 투시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데, 형제를 보면 다 죄가 보여" 이렇게 딱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은근히 기도좀 하신다는 교인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투시의 은사" 

 

도대체 성경 어디에 "투시의 은사"가 있다는 말인가? 하며 그 시절 성경을 아무리 읽어봐도 투시의 은사는 나와있지 않았지만, 그 시절 많은 교회 부흥집회나 은사집회 포스터를 보면 큰 글자로 적혀 있었던 투시의 은사...

 

 

 

바로 전도사님의 말씀이 나오자 마자 제가 했던 말, " 네, 그러세요?"-조용하고 나지막하게 그냥 반응했던 말인것 같습니다. - 그러자 잠깐의 정적..

 

아마 그 전도사님은 죄가 보인다는데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 네, 그러세요? " 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나 봅니다. 

 

그 뒤로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고 그때 당시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었던 같습니다. 

 


 

그 시절 무료 성경 신학원이라고 한참 여기저기 생겨서 또 다른 한명의 후배가 같이 가보면 안되겠냐고, 자신이 성경적으로 잘 모르겠다고...그래서 또 그 후배랑 그 무료 성경 신학원인가를 찾아서 가보았습니다. 앞에서 그 교회 전도사님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를 설명하고 나서는 그 비유풀이를 한다면서 기존 교회에서는 설명해주지 않는다며, 마치 신비한 비밀인양 설명을 해주는데 성경을 조금만 읽어봐도 그 뒤에 예수님께서 설명을 해주시는데,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인냥 말하고는 계속해서 성경의 비밀을 풀어주겠다고 계속 모임에 나오라는 권유정도의 말씀만 하셔서 모임이 끝나고 후배랑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계속 우리 옆자리에 앉아있던 한 남자 청년이 계속 따라오며 자신들의 모임에 정규적으로 나오라고 종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 어떤 부분을 말하는데, 제가 들어보니 성경본문을 엉뚱하게 해석해서, 한글 성경으로 읽어보면 오해할수 있는 부분이지만, 최소한 영어성경만 읽어도 그런 오해를 하지 않는다며, 성경을 원어로 읽지 못하면 그 부분을 설명하는 책이나 영어로 읽어볼것을 권하며 그 청년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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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 문제가 아니라 기존 교인들이 성경을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한게 문제라는것을 그때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은사사역을 하건 종말론이든, 이단이든 그 시절 저의 주변의 종교인들의 모습은 성경에서 시작되었지만, 

성경에서 찾아볼수 없는 뒤틀려진 모습이 많았습니다. 

 


 

대학시절 한 후배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도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자칭 " 환청"을 들으면서 자신의 귀 안으로 계속 누군가가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한 선교단체 안에 속해있었는데, 그냥 그 그룹의 멤버들은 그 친구를 회피하는데, 급급했고, 나는 이 친구의 말을 들어주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그때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께 상담을 드렸는데,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그 친구를 기도사역 하는것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담치료를 받는것을 권유해보는게 어떤가하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때는 그럴지라도 어떻게 목사님이 기도해주시면 안될까? 라는 속상한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목사님이 이해가 됩니다.- 그 친구가 그렇게 배회했던 곳은 선교단체의 일원이었는데, 저 자신 포함해서 그 어느 누구도 그 친구에게 적절한 도움을 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책장을 빼곡히 채운 신앙서적과 은사집회, 수 많은 시간의 성경 연구등도 그 한명의 후배를 돕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도 그 후배에게 적절한 거리(?)를 두며 멀리했었습니다. 그것이 지혜롭다고 스스로 안위하면서 말입니다. 

 


 

ELS와 DTS를 하기 위해 간 남아공 Worcester YWAM Base,

 

첫 주말, 숙소 바로 밑에서 예배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아내와 함께 궁금한 마음에 내려가 보니, Pretoria의 한 지역교회에서 그곳으로 예언사역 전도여행을 온 한 팀이 사역중이었습니다. 

 

드디어 우리 부부차례가 되고, 우리 부부를 빙 둘러싼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어떤 친구는 노래하면서 어떤 친구는 그림을 그리며, 또 어떤 친구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껌을 씹으면서, 우리에게 예언사역을 해주었습니다. 

 

완전한 Culture shock (문화충격)이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뭔가 인위적이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만들거나 목소리를 낮게 깔거나 상대방을 위협하는 듯한 동작이나 말투는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를 나눌때는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도착한지 얼마 안되서 처음 경험했던 이 예언사역을 포함해서 그 이후 많은 곳에서 다양한 사역자들과 함께 예언사역이(Prophetic ministry)나 축사사역-귀신을 쫓아내는 사역-(Deliverance ministry)을 가까이서 볼수 있는 특권을 누려왔습니다. 

 


 

Be natural and supernatural! 

 

인위적인 꾸밈이 없으면서 겸손하게 상대방이 거절할수 있는 여지를 남기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저희 부부를 향한 참으로 귀한 예언사역을 해주신 많은 사역자들과 친구들을 만나게 하셨고, 

 

축사사역을 함께 동참할수 있는 경험들을 하게 되면서, 저희 부부를 가르쳤던 강사들과 사역팀들은 사역받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 그래서 아예 어떤 사역팀들은 그 흔한 기도사역 사진들도 남기지 않는것을 보게 됬습니다. 해치워야 할 사역의 대상이 아닌, 사랑과 관계의 대상으로 보았기에 사역할때 그 사진을 남기기 위해 휴대폰을 아무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을 늘 강조했습니다. 

 

 

 

축사사역할때는 그런 귀신의 영향을 받는 모습이 보이면, 바로 다른 사람들과 분리해서 그 사람의 인격을 지켜주려 하는 끊임없는 타인을 배려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와 닿았습니다. 

 

 

 

심지어 Mendocino YWAM Base(멘도시노) 에서 Supernatural School Of Mission(초자연적 사역학교)에서 훈련받을때 강사로부터 상대방에게 나의 입냄새로 인해 불쾌감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반드시 사탕이나 껌 등을 휴대하라고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성령님의 은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은사를 통해 누구를 통제하거나 우리를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예수님의 심장으로 바라보며, 우리가 가진 것으로 섬기는 사역입니다. 

 

 

 

성령님의 은사사역은 성경과 성령님의 성품을 대변하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것처럼 하나됨을 위해서 철저한 통제와 권위에 대한 순복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7장 23절

 

곧 내가 그들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함이로소이다. 

 

 

 

성령님의 은사사역은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의 예언적인 기도가 사역 상대방으로 부터 맞지 않는것 같다는 말을 들어도, 우리의 치유기도에 대해 상대방이 별로 신체의 변화가 없다는 반응을 들을지라도 

 

우리는 성령님의 통로가 되어 우리의 경험이 성경을 통제하지 않고, 성경 말씀이 우리를 통제하도록 해야합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마가복음 17장 17절 

 

" 믿는 사람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18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니라" 

 

 

 

라는 말씀에 따라 다시 예언을 사모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의 영광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영광가운데 동참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성령님과 동행하고 성령님의 은사사역에 참여합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성령님과 동행하며 은사사역을 하는 것이 우리의 자아를 더 드높여 주기 위한 통로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의존하며 동행하는 것은 우리의 죽은 자아를 붙잡고 그래도 뭔가 살릴만한 구석이 있겠지 라고 

 

바라보는 자기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늘 어린아이 같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삶이라

 

도저히 자신을 높일래야 높일수가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부터 옵니다. 우리의 액면 가치, 우리의 가치체계가 우리의 

 

어떤 행동으로 인한 결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고아의 영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생각들- 우리의 

 

신분 자체에서 비롯됨을 인식할때 우리는 비로소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쉼을 누리는 

 

묘한 이중성을 경험할수 있게 됩니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의 한 교회의 주일예배 모습 - 찬양이나 설교, 사역이 마치 미국의 한 교회에 온 것처럼 닮아있었다. 


 

 

 

극단적인 한쪽의 중단주의(Cessationism-사도 시대 이후로 성령님의 은사가 사멸했다는 주의- 와 

은사주의 -특히 한국적인 권위주의와 신비주의가 결합된- 가 아닌 성령님의 열매를 사모하며 

주변의 약한자와 필요한 자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Comfort zone(안전한 지역)을 벗어놔 성령님을 의지하기에 나의

자의식의 혼돈 때문에 느껴지는 아슬아슬하고 진땀나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사역, 

바로 그것이 성령님과 함께 하는, 오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건강한 사역이 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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