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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훈련으로 본 은사사역: 언제가 시작할 단계일까?

The Kingdom Now(현재적 하나님의 나라)

by Going to Nations 2021. 7. 9.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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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위치한 Mendocino 라는 아주 조그만 도시에 위치한
YWAM Mendocino.

잔뜩 부푼 마음을 가지고 시작한 SSM(Supernatural School of Mission: 초자연적 선교학교)의 첫번째 주
Base Leader 의 introduction 시간,

그런데 처음 강의에서 전통적인 논쟁거리중 하나인 은사사역에 대한 도발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은사사역으로 인도하셨는지, 성격과 인품을 먼저 쌓게 하셨는지,
아니면 소위 말하는 은사사역, 병든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는지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복음서에 나오는 다양한 장면들로 우리들을 인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오랜동안 막연히 성령님의 열매가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사고의 틀에 머물러 있던
나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강의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사복음서,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계속해서 읽고 묵상하고 읽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점점 또렷하게 보여지는 예수님의 제자훈련의 방식은
그때까지 설교나 책들에서 듣고 읽어왔고, 막연히 생각해왔던 성품 먼저 그 다음 은사사역 이러한 패턴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문화와 전통이 우리의 사고체계에 너무 깊게 뿌리 내린 나머지
성경도 자신의 세계관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자~ 이제 성경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제자들을 능력 사역으로 초대하는지 성경을
통해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 1절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2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마가복음 6장 7절
열두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12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절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마태복음 10장 1절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8절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나타난 이러한 사역의 위임 전에 제자들의 삶에 어떠한 성품의 변화가 있었나요?
어떤 자그마한 계기를 찾을수 있나요? 성경은 이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초자연적 능력을 이용한 사역에로의 초대 이후의 제자들의 성품은 성경에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까요?

미국/ Mendocino YWAM Base의 풍경/ 산림지역에 있어서 사슴이 자주 나타난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에서는 멈추고, 성경이 말하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많은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중에서 반복되는 주제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를 추론해볼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는 "누가 크냐" 입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끊임없는 서열싸움, 권력욕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 "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고 물어봅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능력사역, 은사사역을 시작한 때는 마태복음 10장 1절입니다. 지금 18장 이니 여전히 제자들은 사역의 현장에서
치유사역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는 엄청난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사역자들입니다.

마태복음 하나의 복음서에서 보더라도 마태복음 10장 이후에 14장 오병이어의 기적, 그리고 베드로의 물위를 걷는 사건
15장 떡 일곱개와 생선 두마리로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사천명을 먹인 기적
16장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할때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하신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엄청난 계시를 받았음을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모습,
17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는 놀라운 체험을 하고,
가버나움에서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자 낚시해서 얻은 고기로 세금을 바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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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에 오기전까지 베드로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매일같이 쏟아지는 기적이 일상이 된듯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18장 1절에서 여전히 제자들에게 공공연하게 있는 이슈가 수면위로 드러납니다.
" 누가 크냐?" 이 논쟁을 하며, 스스로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결국 예수님께로 이 문제를 들고 옵니다.
자기들끼리 사역을 비교하고, 능력을 비교하고, 다른 사역자를 깍아내리다가 결국 예수님, 판결을 내려주세요
라고 온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을때
7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도 아마 추측해보건데 서로 왜 떡을 안챙겼냐고 핀잔을 주었을거라고
생각해봅니다. 베드로가 "야..너희들 왜 떡 안챙겼어?" 그럼 다른 제자가 " 왜 내가 떡을 챙겨야 되는데..그럼
넌?" 이라고 물어봤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권력욕에 대한 파워게임은 마태복음 20장 20절 21절에서 극대화됩니다.
성경속 치맛바람의 원조인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예수님의 양쪽에 세워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니깐 그 뒤 열 제자가 그 소식을 듣고 뒤통수 맞았다고 하는 느낌으로 또 분노하게 됩니다.(마20장 24절)

그리고 유월절 성만찬 식사하기전 하루 중 여행으로 더렵혀진 발과 손을 씻어주기 위해 제자들중 아무도
먼저 일어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제자들은 아마 속으로 계속 생각 했을 것입니다. " 내가 왜 너희들 발 씻고 손 씻을 물을 떠오냐? " 라구요.
(요한복음 13장 4절 참조)

" 누가 크냐" 라는 끊임없는 이 내부의 경쟁과 질투는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다른 형태의 사역을 인정하는 미덕을
잃어버린채 다른 사역단체나 사역자를 비판하고 깍아내리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누가복음 9장 49절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요한의 편협함과 예수님의 건강한 자아상은 이렇게 다른 사역과 사역자를 대할때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가 주님안에서 건강한 자아상을 가질때 왜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할수 없는 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인정하고 기꺼이 용납할수 있게 된다.


두번째 " 공감의 능력, 눈을 맞추는 능력의 부족" 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3절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자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면 특히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성이 생깁니다.
사역의 효율에서 어린아이들은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이 많게 됩니다.

마태복음 20장 29절 부터는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를 지나갈 무렵 두 명의 청각장애인이 치유를 원해서
예수님을 소리 높여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31절에 보면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고 말합니다. 이 무리중에 제자들도 있었으리라
추측해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예수님과 병자들을 이어주는 역활을 해주어야 했는데 말이죠.
예수님께서 부르기 전까지 제자들중 누구도 이들의 삶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9장 49절과 50절로 돌아가보면 예수님의 50절 말씀 "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는 말씀을 들은 요한이 다시 몇절 후에 등장합니다.

바로 51절부터 56절 사이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가시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통과하려 하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에 받아들이지 않자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시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반응입니까? 이들의 발언대로 라면 종교집회를 하러 다니다가 집회를 못하게 막으니 그 도시를 폭파합시다 라고 말하는 사역팀이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요. 나의 사역을 방해한다고 마을의 사람들을 다 불태워 죽일까요?
라고 말하는 살기등등한 이 젊은 두 청년이 앞에 서있다고 생각해보세요.

55절에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이렇게 한글 개역 개정판에는 나와있지만,
킹제임스번역본 등을 포함한 많은 영문성경에는 이 부분이 또 포함되어있습니다.

" You do not realize what kind of Spirit you belong to" "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하였는지 알지 못하는 구나" 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선교단체나 교회에서 만일 한 사역자가 사역을 방해받았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하고, 테러를 가하자고 했다고 하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요?
아마 지도자들은 모여서 그 사역자와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아예 당분간 사역에서 손을 떼게 하거나
내적치유나 상담치료를 권유하거나 단체에서 제명같은 절차를 통해 사역기회를 아예 빼앗아 버릴수도 있을겁니다.
그리고 양육 시스템을 전면 재검토해야겠다고 하고 당분간 모든 은사집회나 사역은 멈추고,
성품이 온전해 질때까지 다른 모든 사역을 스톱해라고 결정할수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나 위험하게(?) 다시 그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깍아내리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아예 몽땅 불태워 버리려는 이 극단적인 테러리스트와 같은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에 의해 세워집니다.

누가복음 10장 1절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인을 세우사
9절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미국/ 멘도시노 YWAM / SSM(초자연적 선교학교)/ 처음 시작한 날로부터 스탭들이 다가와 아내와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사역하는 모습(프라이버시로 인해 사진을 흐리게 처리함)

지금까지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 마음가운데 경쟁과 질투, 증오와 열등감이 가득한 제자들을
여전히 은사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하도록 요청받는 것을 우리는 읽어보았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은사사역 자체를 위해 아무런 성령님의 열매들이 필요치 않다고 예수님이 생각하셨다거나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만드는 방식은 너무나 극단적이고(?) SSM에서 처음 이 부분을 베이스 리더로 부터 강의를 통해 듣고,
계속 진짜 그랬나 하며 성경을 읽어보고 또 읽어보면서도 아직도 어떻게 이런 제자들에게
사역을 하도록 허용했을까가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배우게 되는 것은,
예수님은 성령님의 열매뿐만이 아니라 성령님의 은사를 활용한 사역을 제자들에게

Day 1부터 요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내 삶 가운데 성품이 온전하지 않기에 내 삶 가운데 은사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다라는
것이 전혀 성경과는 맞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여전히 성품이 먼저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럼 언제쯤 우리의 성품이 온전하여질까요?
우리의 성품이 온전하여질때까지 우리가 능력있게 사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진것일까요?



은사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의 성품의 온전함을 전혀 보장하지 않다는 것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동시에 은사사역을 받는 사람이 또한 사역을 하는 사람을 떠 받드는 맹신으로 부터 보호해주는것 같습니다.
은사사역에 대한 건강한 성경적 가치정립이 우리를 균형적으로 은사사역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세계 각국에서 길거리에서 전도하며, 처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도 또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불신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을지어다 라고 선포할때 다른 사람의 육체가운데 치유가 일어났다는 간증과 강의, 책들을 접하면서 은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능력임을 다시 한번 고백하게 됩니다.

한 쪽-성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정보의 홍수, 즉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은사사역에 대한 다른 시각에서 이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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